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스톤 빌라 FC (문단 편집) === [[마틴 오닐]] 재임 시절 (2006~2010) === 새 구단주인 랜디 러너는 팬들에게 반감을 사는 타 구단주들[* 그 중에서도 [[맨유]]를 은행빚으로 산 [[맬컴 글레이저]] 구단주나 전 [[리버풀 FC]] 구단주이던 질레트와 힉스, 두 사람은 러너에 두고두고 견주면서 곱배기로 까였다. 넷 다 미국인이기에 더더욱 비교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리버풀 새 구단주인 미국인 [[존 헨리]]는 공격적인 투자, 팬들과의 소통, 개념찬 인터뷰 등으로 리버풀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러너와 같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나 이전까지 무개념인 다른 양키 두 놈에게 시달리던 리버풀 팬들에겐야 말 그대로 헨리'느님'.)]과는 달리 팬들에게 다가가는 스타일. 팬들과 펍에서 어울리면서 팬들의 의견을 듣고 팀에 반영한다. [[미들즈브러 FC]]의 스티브 깁슨 구단주와 더불어 구단주의 바람직한 이상향으로 평가된다.구단을 인수한것도 영국 유학시절 아스톤 빌라의 팬이 되어서라고 한다. 그리고 [[셀틱 FC]]에서 명장으로 평가받았던 [[마틴 오닐]] 감독을 전격 영입하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열의를 보였다. 마틴 오닐 새 감독 체제 하의 아스톤 빌라는 첫 시즌인 2006-07 시즌, 지난 시즌 16위였던 팀을 11위로 끌어올렸다. 초반에는 9경기 무패, 그리고 11경기 무승, 그리고 9경기 무패의 롤러코스터 행보를 보였지만 강등 걱정 없이 중위권으로 무난하게 마쳤다. 그리고 겨울 이적시장에서 [[왓포드 FC]]로부터 [[애슐리 영]]을, [[올림피크 리옹]]에서 [[욘 카레브]]를 영입했다. 2007-08 시즌에는 지난 시즌보다 더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프리미어 리그 6위로 마무리했다. [[욘 카레브]]와 [[가브리엘 아그본라허]], 그리고 [[애슐리 영]]의 삼각편대는 33골을 합작했다. 그리고 애슐리 영은 17개 도움으로 파브레가스에 이어 프리미어 리그 도움 2위를 기록했다. 빌라의 총 팀득점은 71골로 준우승팀인 첼시와 4위 팀 리버풀보다 각각 6골, 4골 더 많이 득점했다. 51번이나 허용한 실점 수는 좀 아쉽지만, [[맨유]]에게 호구잡히며 2경기 홈어웨이에서 8골을 내준 경기나, 토트넘과 첼시 원정에서 각각 4-4로 비기며 명승부 대첩급 경기를 펼친 것을 감안하면 [[올로프 멜베리]]를 필두로 한 빌라의 수비는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18경기 연속으로 실점한 것은 흠이다.] 맨유를 제외하면 강팀에 쉽게 지지 않는 면모[* 첼시에 상대전적 1승1무, 빌라파크에서 첼시에 2-0으로 이겼는데 이 경기에서 관전하던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로 하여금 관중석을 박차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얼마 뒤 무리뉴는 첼시를 떠났다. 아스날 원정에서 종료 직전까지 1-0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벤트너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아쉽게 비겼고,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종료 직전까지 2-1로 앞서다 2-2로 비겼다.]를 보였다. 빌라는 2월까지 ~~무재배로 승점을 까먹는~~ 리버풀과 에버튼, 맨시티와 치열한 4위 자리 쟁탈전을 벌였지만, 무득점 3연패 포함 5경기 무승에 빠졌고, 같은 기간에 리버풀은 연승행진을 달리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4위는 점점 더 멀어졌다. 그래도 33라운드에서 볼튼에 4:0 대승을 거두며 19경기만에 무실점 경기를 한 뒤 강등이 확정된 더비 카운티에 6:0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지역라이벌 버밍엄 시티에 5:1로 대승을 거두며 강등 위기에 빠뜨려 3경기 15득점으로 5위 에버튼을 3점차로 추격했다. 36라운드 맞대결에서 2:2로 승부가 나지 않았고 최종전 끝에 6위로 마쳐 UEFA컵 대신 인터토토컵에 나가게 됐다.[* 이해 FA컵은 8위 포츠머스, 리그컵은 11위 토트넘이 우승하여 6위는 UEFA컵 출전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2008-09 시즌 인터토토컵 우승으로 UEFA컵 진출에 성공했다.] 2008-09 시즌, 지난 시즌 좋았던 분위기를 더욱 이어갔고 캐류-아그본라허-영 삼각편대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25라운드까지 15승6무4패로 첼시와 아스날을 제치고 3위까지 올랐다. 개막전부터 아그본라허의 해트트릭으로 맨시티를 4:2로 꺾은 뒤 13라운드 아스날 원정에서는 2:0 승리에 성공하고 천적 맨유를 상대로는 0:0으로 비기기도 했다. 겨울이적시장에서는 잉글랜드 국가대표 공격수 [[에밀 헤스키]]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5위 아스날과는 승점 7점 차로 벌리며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듯 했다. FA 컵에서도 에버튼을 만나 16강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상황. 우승경쟁에서 4위까지 떨어지자 첼시는 [[펠리페 스콜라리]]를 전격 경질했고, [[거스 히딩크]]를 소방수로 임시 감독에 앉혔고, 첫 상대부터 '첼시의 무덤'[* 1999년 이후 10년 간 첼시는 빌라파크에서 6무3패를 기록했다. 무리뉴도 깨지 못했던 기록.] 빌라 파크에서 빌라와 만나게 되었다. 뒤숭숭한 첼시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빌라는 리그 13경기 무패로 기세가 올라와 있던 상황. 그런데 히딩크 감독의 첼시 데뷔전에서 빌라는 첼시에 0-1로 패하며 무패 행진이 깨져버렸다. 베스트 11을 무리하게 돌려 경기력이 떨어지자 빌라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올인하기 위해 UEFA 컵 32강 2차전 CSKA 모스크바 원정에 2진급을 내며 탈락했다. 그러나 스토크 시티와의 홈에서의 27차전에서 후반 43분까지 2-0으로 앞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 2골을 허용하며 2-2로 비겼다. 빌라는 프리미어 리그 9경기 무승, 공식 경기 13경기 무승을 기록했고, 이를 틈타 아르샤빈의 영입 뒤 연승행진을 시작한 아스날에게 4위 자리를 빼았겼다. 결국 빌라는 지난 시즌에 이어 프리미어 리그 6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라는 법칙에 랜디 러너 구단주도, 마틴 오닐 감독도, 노장 골키퍼 브래드 프리델도 울었다. 여담으로 최종전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데이미언 더프]]의 자책골로 1-0으로 승리했는데 이 결과로 인해 뉴캐슬은 16년만에 프리미어리그에서 챔피언십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2009-10 시즌을 맞아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다시 노리는데 전부터 리버풀로 가고 싶다며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챔피언스 리그 뛰게해주세요]]라며 징징대는 주장 [[가레스 배리]]를 이적 허가 시켰더니 이게 ~~돈만 보고~~ 챔피언스 리그도 안나가는 [[맨체스터 시티]]로 가버렸다.(...)[* 사실 2001년에도 주장 [[가레스 사우스게이트]]가 가레스 배리처럼 비슷한 행동을 하고 미들즈브러로 가버린 전례가 있다. 그 전에도 우고 에히오구와 조지 보아텡을 똑같은 방식으로 미들즈브러가 채가서 빌라 팬들은 보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 [[리차드 던]]을 영입했다. ~~주장끼리 트레이드~~ 던 이외에도 [[스튜어트 다우닝]]과 스티븐 워녹도 영입했다. 유망주 [[파비안 델프]]도 3부리그 [[리즈 유나이티드]]로부터 영입했다. 2009-10 시즌 전 프리 시즌 2009 피스 컵 안달루시아 대회에서 [[유벤투스]]를 승부차기로 꺾고 우승했다. 유로파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오스트리아의 [[라피트 빈]]에게 원정 다득점으로 광탈했다. 하지만 프리미어 리그에서 리버풀이 부진한 가운데 아스톤빌라는 이적생 리차드 던과, 스티븐 워녹의 뛰어난 수비력과, 아그본라허와 밀너, 애슐리 영의 활약으로 전반기 19경기 동안 10승5무4패로 승점 35점을 획득.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전반기 최다 승점을 기록했다. 전반기 리버풀 원정에서 3-1 승리, 첼시에 홈에서 2-1 역전승, 그리고 천적 맨유를 올드트래포드에서 1-0으로 승리하며 빅4에 그랜드슬램을 기록할 뻔했다. 하지만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아스날 원정에서 후반 20분까지 0-0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으나 부상에서 돌아와 교체 투입된 아스날의 주장 ~~벤치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세스크 파브레가스]]에게 2골을 허용하며 ~~그리고 다시 부상으로 교체되었다.~~ 0-3으로 아쉽게 패했다. 그리고 빌라 파크에서 부진에 빠진 리버풀에게 종료 직전 [[페르난도 토레스]]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리그 첫 연패를 허용했다. 칼링 컵에서는 준결승에서 블랙번을 상대로 홈에서 6:4 ~~야구경기~~ 명승부를 펼친 끝에 합계 7:4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맨유에 1-2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리버풀전 패배 후 10경기 무패를 기록했지만 무승부만 7개로 웨스트 햄이나 선더랜드, 울버햄튼 등 하위권 팀을 상대로도 이기지 못하며 아쉬운 경기를 했다. 그러다가 첼시 원정에서 [[프랭크 램파드]]에게 4골을 헌납하며 충격적인 7:1 패배를 당했고 10경기 무패 행진이 깨졌다. 그리고 2주일 뒤에는 FA 컵 준결승에서 첼시를 상대로 다시 한번 0-3으로 완패당했다. 리그 무패가 종료된 뒤 5경기에서 4승1무를 기록하며 마지막까지 4위 자리를 놓고 토트넘과 아스톤빌라, 리버풀과 경합을 펼쳤다. 하지만 37라운드 맨시티 원정 단두대 매치에서 먼저 선제골을 넣고도 1-3으로 역전당하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이 좌절되었다. 빌라는 3년 연속 6위로 마감했다. 오닐의 아스톤빌라 감독 재임 시절 랜디 러너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2006-07 시즌 중위권으로 도약한 뒤 2007/08에서 2009-10 시즌까지 호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아스톤 빌라는 빅4인 첼시, 맨유, 리버풀 등 강팀들 그리고 에버튼, 맨시티, 토트넘 등 중상위권의 강팀들을 상대할 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대등한 승부를 벌이며 팬들에게 재미있는 경기들을 선사했다. 빌라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으로 6위를 기록했지만, 전반기에서 시즌 2/3분기 까지는 4위권 내에 항상 있다가 마지막 1/3을 잘 보내지 못해서 DTD, 성적이 하락하여 6위로 떨어지는 현상을 반복했다. 그래도 러너 구단주는 오닐에게 굳건한 신임을 보여줬고 아스톤 빌라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그러나 오닐 시절의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기에 빌라의 몰락의 그림자가 엄습해있었음을 아무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0-11 시즌 8월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마틴 오닐 감독은 돌연 사퇴를 선언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랜디 러너 구단주가 오닐과 불화를 일으키다가 오닐을 해고했다."고 보도했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다. 러너 구단주는 감독이 마음에 안 들어 해고할 만큼 전임 구단주 덕 앨리스처럼 괴짜가 아니었다. 러너가 오닐을 무시하고 [[가레스 배리]]와 [[제임스 밀너]]를 오일머니 맨시티에 팔자 오닐이 분노하여 사임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배리는 2008-09 시즌 빌라가 챔스에 진출하지 못하면 챔스권의 팀으로 이적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결국 빌라가 6위로 챔스에 못나가며 ~~챔스도 안나가는~~ 맨시티로 이적했고, 밀너의 경우는 빌라가 구단 역사상 최고 주급을 제시했지만 더 높은 주급을 제시한 맨시티로 이적했다. 프로는 결국 돈이기 때문에 두 선수 모두 더 높은 주급과 유럽대회 출전 야망을 위해 빌라를 떠난 것이다. 오닐이 사임한 까닭은 더 이상 러너 구단주가 아스톤 빌라를 위해 이적 자금을 충당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닐은 아스톤빌라에서 '''4년 재임 기간 동안 1억 2000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이적 자금을 쏟아부었다. 당시 한화로 2000억. 맨유, 맨시티, 첼시, 리버풀처럼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거나 구단주가 엄청난 머니를 가지고 있는 팀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지만, 공업도시 버밍엄을 연고로 하며 수익구조에 한계가 있는 빌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거금을 주고 데려온 선수들이 잘 해줬으면 다행이었지만 대부분이 실패하는 바람에 ~~성공했으면 챔피언스 리그 나갔지~~ 빌라의 재정 압박은 심화되고 있었다. 마틴 오닐이 영입한 선수들 중 [[제임스 밀너]]와 [[애슐리 영]], 욘 카레브, 리차드 던은 성공했다. 그러나 나이젤 리오 코커, [[스티브 시드웰]], [[커티스 데이비스]], [[잿 나이트]], 하비브 베예, 루크 영 등 대부분은 한 시즌 정도 반짝하거나 실패작이었다. 그리고 데려온 선수들도 주로 고비용 저효율의 영연방 중심이었고, 유럽의 값싸고 재능있는 선수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오닐은 빌라의 유스시스템에서 나온 재능있는 유망주들을 홀대했고, 그 결과 [[게리 케이힐]], 리암 리지웰, 크레이그 가드너 등이 다른 팀들로 떠나고 말았다. 그 중에서 개리 케이힐은 볼튼에서 포텐을 터뜨리며 잉글랜드 국가대표 센터백이 되었고, 첼시로 이적하여 주전 센터백이 되었다. '''유망주들을 홀대한 결과 전력의 기반과 뎁스는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또한 2000억원을 사용한 것에 비해서 3년 연속 6위를 기록한 것에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오닐의 전술은 쉽게 지지 않는 축구였지만 쉽게 이기지도 못했다. 강팀 상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만 약팀 상대로도 쉽게 덜미를 잡혔다. 주 전술은 아그본라허-애슐리 영-욘 카레브의 삼각편대를 바탕으로 빠른 역습에 의존한 잉글랜드식 축구였다. 이러한 전술은 강팀을 상대로 잘 먹힐 때가 많았지만, 약팀에게도 비슷한 전술을 사용했고, 그 결과 약팀에게도 승점을 많이 잃었다. 또한 베스트 11 외의 선수들을 기용해 로테이션을 가동하며 변화를 주겠다는 생각을 안했고, 안그래도 얇은 스쿼드에 항상 고정된 멤버들이 가동된 결과 빌라는 시즌 막판만 되면 주축 선수들의 체력이 방전되어 스스로 무너졌고, 실력이 있는데도 벤치에서 실력이 썩고있는 선수들이 많았다. 또한 주급이 싼 유망주 대신 검증된 선수들만 영입하며 베스트 11을 짠 결과 '''이적료도 많이 나갔고, 주급도 7천만 파운드(1500억)이나 소비되었다.''' 그렇게 '''비대해진 이적료와 주급 체계'''로 돈을 마구 소비하고, 챔피언스 리그에는 진출하지 못하며 적자가 많아지자 랜디 러너 구단주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고, 그 결과 오닐 감독은 사임해버렸다. 그 이후 아스톤 빌라는 강등권에서 겨우 탈출하는 팀으로 변했고, 2015-16 시즌에는 강등이 사실상 확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